KBS 다큐인사이트
6.25 한국전쟁 70년 기획
[1950 미・중 전쟁] 3부작
마지막회 - 대치
★★★ 본 방송 : 2020.7.23 목요일 밤 10시 KBS 1TV ★★★
국내 최초 공개, 군사분계선 합동 실측 영상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유엔군과 북한군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미국 National Archive에 소장돼 있던 해당 영상은 이제껏 사진으로만 공개됐던 1963년 9월 5일 군사분계선 0769지점의 합동 실측 영상이다. 미군과 한국군, 북한군 실무자들이 군사분계선에서 탁자를 둔 채 마주 앉아 합동 실측에 관해 논의하고, 군사분계선을 명확히 긋기 위해 초단파 거리측정장치를 작동시키는 모습이 담겨 있다.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군사분계선 합동 실측 영상은 [1950 미·중 전쟁] 3편 대치에서 볼 수 있다.
중국의 핵실험 준비와 미국의 중국 공격 계획
1950년 전쟁 이후 세계는 빠르게 냉전 구도로 개편되고, 미국과 중국의 대치는 중국의 핵실험을 둘러싼 미국의 공격 계획과 1965년 발발한 베트남전까지 이어졌다. 1964년 중국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그 해 12월 미국의 무기 통제 및 군축 기관(GW Rathjens)은 ‘중국의 핵무기 사용 능력 파괴에 관한 공격 계획’을 발표하며 대치를 이어나간다. 미 국무부 문서와 미합중국의 외교 관계 문서에서 드러난 미국의 중국 공격 계획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국내·외 전문가를 만나 1950 미·중 충돌에 이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미·중간의 대치를 들여다본다.
전쟁 종결을 둘러싼 미국 내 갈등
전선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사이, 미국에서는 전쟁 종결을 둘러싸고 대논쟁이 벌어졌다. 군비와 경제력 증강을 위해 주안점을 ‘유럽’에 둘 것인지, ‘아시아(중국)’에 둘 것인지를 두고 미 지도자들 사이 주장이 엇갈렸다. 1950년 12월, 아이젠하워가 북대서양조약기구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맥아더는 해임되는데... 트루먼과 맥아더를 주축으로 펼쳐진 미국의 대논쟁을 따라가 본다.
2년 이상 걸린 정전 협정과 지도자들의 전쟁 전략
52년 1월, 포로 문제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정전 협상은 또다시 결렬되고, 한반도는 이념전과 심리전의 무대가 됐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전 협정이 체결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765차례의 회의와 협상. 미국과 중국에게 정전협정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한반도 전쟁을 둘러싼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의도를 들여다본다.
“한반도에 미국을 끌어들이면 유럽에 대한 압력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포로 문제에 대해 절대 양보하지 않고 미국과 끝까지 가겠다고 했으며 그것이 그들의 전략이었습니다“
-주젠룽/도요가쿠엔대 교수
1950 미·중 충돌에 이어 현재까지도 인도태평양전략과 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으로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미국과 중국. 전쟁의 결론은 나지 않은 채, 더 많은 과제를 남긴 70년 전 미·중 전쟁을 돌아보며 한반도의 미래를 모색해본다.
#미중전쟁 #냉전 #625전쟁 #다큐인사이트
6.25 한국전쟁 70년 기획
[1950 미・중 전쟁] 3부작
마지막회 - 대치
★★★ 본 방송 : 2020.7.23 목요일 밤 10시 KBS 1TV ★★★
국내 최초 공개, 군사분계선 합동 실측 영상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유엔군과 북한군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미국 National Archive에 소장돼 있던 해당 영상은 이제껏 사진으로만 공개됐던 1963년 9월 5일 군사분계선 0769지점의 합동 실측 영상이다. 미군과 한국군, 북한군 실무자들이 군사분계선에서 탁자를 둔 채 마주 앉아 합동 실측에 관해 논의하고, 군사분계선을 명확히 긋기 위해 초단파 거리측정장치를 작동시키는 모습이 담겨 있다.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군사분계선 합동 실측 영상은 [1950 미·중 전쟁] 3편 대치에서 볼 수 있다.
중국의 핵실험 준비와 미국의 중국 공격 계획
1950년 전쟁 이후 세계는 빠르게 냉전 구도로 개편되고, 미국과 중국의 대치는 중국의 핵실험을 둘러싼 미국의 공격 계획과 1965년 발발한 베트남전까지 이어졌다. 1964년 중국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그 해 12월 미국의 무기 통제 및 군축 기관(GW Rathjens)은 ‘중국의 핵무기 사용 능력 파괴에 관한 공격 계획’을 발표하며 대치를 이어나간다. 미 국무부 문서와 미합중국의 외교 관계 문서에서 드러난 미국의 중국 공격 계획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국내·외 전문가를 만나 1950 미·중 충돌에 이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미·중간의 대치를 들여다본다.
전쟁 종결을 둘러싼 미국 내 갈등
전선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사이, 미국에서는 전쟁 종결을 둘러싸고 대논쟁이 벌어졌다. 군비와 경제력 증강을 위해 주안점을 ‘유럽’에 둘 것인지, ‘아시아(중국)’에 둘 것인지를 두고 미 지도자들 사이 주장이 엇갈렸다. 1950년 12월, 아이젠하워가 북대서양조약기구 사령관으로 임명되고 맥아더는 해임되는데... 트루먼과 맥아더를 주축으로 펼쳐진 미국의 대논쟁을 따라가 본다.
2년 이상 걸린 정전 협정과 지도자들의 전쟁 전략
52년 1월, 포로 문제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정전 협상은 또다시 결렬되고, 한반도는 이념전과 심리전의 무대가 됐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전 협정이 체결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765차례의 회의와 협상. 미국과 중국에게 정전협정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한반도 전쟁을 둘러싼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의도를 들여다본다.
“한반도에 미국을 끌어들이면 유럽에 대한 압력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포로 문제에 대해 절대 양보하지 않고 미국과 끝까지 가겠다고 했으며 그것이 그들의 전략이었습니다“
-주젠룽/도요가쿠엔대 교수
1950 미·중 충돌에 이어 현재까지도 인도태평양전략과 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으로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미국과 중국. 전쟁의 결론은 나지 않은 채, 더 많은 과제를 남긴 70년 전 미·중 전쟁을 돌아보며 한반도의 미래를 모색해본다.
#미중전쟁 #냉전 #625전쟁 #다큐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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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 Docu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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