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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의 '포르말린 강가에서' [시 읽는 토요일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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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말린 강가에서 / 김혜순
시험관에 담긴 뇌는 아직 살아 있다.
시를 쓰고 있나보다.
흐릿한 이미지에 풍덩 하고 있다.
외갓집 문을 바람처럼 열고 있다.
죽은 외할머니의 품속에 뛰어들려는 찰나.
없는 눈이 번쩍 떠지자.
사라진 몸의 어딘가가 환생한
검정작대기가 대갈통을 후려친다.
시험관에 담긴 뇌는 아프다.
너는 네 밖에 있는 사람.
밖이 아픈 사람.
사라진 발가락들이 아프다.
흩어진 방들이 아프다. 심장이 아프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열 손가락으로 온몸을 긁고 있다.
피 맺히게 긁고 있다.
시험관에 담긴 뇌는 떠난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시험관을 떠난다.
연쇄살인범의 비닐봉지에 담긴 머리처럼
흔들 흔들 떠난다.
말하고 싶은데 다 말하고 싶은데
입은 다물리고
손은 떨리고
신발은 어디 갔나.
시험관 안으로 검푸른 밤의 뿌리가 내려온다.
실험실의 사람들마저 떠나고
시험관의 뇌는 중얼거린다.
내 안의 희디흰 괴물
푸른 잠옷을 입었네.
너는 물처럼 투명해
감촉도 부드러워
그렇지만 독사의 푸른 침처럼 치명적이야.
시험관의 뇌는 방관자의 뇌 살아남은 자의 뇌.
시험관에 담긴 뇌는 늘 머리를 벽에 짓찧으며 울고 싶다.
포르말린 강에 담긴 뇌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 시같이 막연한 곳
이 시같이 애매한 곳
이 시같이 소독된 곳
시험관의 뇌는 포르말린 모자를 쓰고 골똘히 생각해본다.
밖은 왜 늘 아픈가.
없는 두 발은 왜 아픈가.
두 발바닥을 받친 강바닥은 왜 무너지는가.
온몸에 불을 붙인 사람이 다리 난간에 서 있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소리친다.
시험관에 담긴 뇌가 미친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어떻게 하면 잊냐고.
기획: 박유리, 낭송: 김혜순, 영상편집: 윤지은, 영상 : 이경주, 박종찬, 박성영, 제작: 한겨레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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