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8일의 기적, 경부고속도로’
1970년 7월 7일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우리나라는 물류 혁명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농업사회에서 공업 사회, 더 나아가 중화학 공업 사회로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기술도 자원도 자본도 없는 가난한 변방국이었다. 어떻게 세계 유례없는, 2년 5개월 만에 최저비용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할 수 있었을까?
■ ‘길에서 찾다 - 아우토반 위의 박정희’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아우토반의 모습에 사로잡혔다. 경제발전을 위해서 국가의 대동맥이 될 만한 고속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는 대규모 토목건설을 할 수 있는 기술도 비용도 없었다. 서독 방문 후, 4년 동안 조용하고 치밀하게 고속도로 건설을 준비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을까? 당시 증언과 함께 경부고속도로와 관련된 박정희의 친필 메모와 설계도 등이 공개된다.
■ ‘경부고속도로의 작은 영웅들’
1968년 2월 1일, 야권과 언론 등에서 쏟아지는 많은 우려를 뒤로 한 채, 드디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첫 삽을 뜨게 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은 말 그대로 전투현장을 방불케 했다. 정해진 공기 내 완공될 수 있도록 현장은 밤낮없이 돌아가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당시 열악한 공사 환경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초석이 된 그들의 희생을 당시 건설 현장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 ‘경부고속도로의 숨겨진 이야기’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을 자극한 서독, 에르하르트 수상의 한마디, 당시 두 정상 사이에는 무슨 말이 오고 갔을까? 당시 정부는 경부고속도로에 필요한 토지를 어떻게 순식간에 사들였을까? 경부고속도로의 시작인 한남대교는 왜 4년에 거쳐 만들었을까? 현대건설 측에 수지에 맞지 않는 장사가 돼 버린 경부고속도로 건설,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고속도로 건설을 둘러싼 뒷이야기가 공개된다.
■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부산에서!’ - 경부고속도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다
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우리나라는 새로운 문화가 시작된다. 바로 일일생활권 문화이다.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부산에서 먹을 수 있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경제적인 효과뿐 아니라 레저문화라는 것이 처음 생겨났다. 또 여러 가지 볼 수 없었던 것들도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고속버스이다. 그 중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버스였던 그레이하운드! 그레이하운드의 운전기사와 버스 승무원은 모두의 선망 직종이었다. 미스코리아 출신 버스 승무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버스 기사와 승무원 등, 70년대 경부고속도로를 상징하던 사람들을 만난다.
■ ‘더 큰 세상을 향한 길,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이동 시간을 줄인 지리적 효과와 더불어 국토 어디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심리적 거리감을 줄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생각의 반경이 넓어졌고 자신의 가능성 및 꿈을 더 크게 꿀 수 있게 되었다.
※ 이 영상은 2013년 7월 13일 방영된 [다큐극장 - 428km의 땀과 눈물, 경부고속도로] 입니다.
#경부고속도로 #박정희 #정주영
1970년 7월 7일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우리나라는 물류 혁명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농업사회에서 공업 사회, 더 나아가 중화학 공업 사회로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기술도 자원도 자본도 없는 가난한 변방국이었다. 어떻게 세계 유례없는, 2년 5개월 만에 최저비용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할 수 있었을까?
■ ‘길에서 찾다 - 아우토반 위의 박정희’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아우토반의 모습에 사로잡혔다. 경제발전을 위해서 국가의 대동맥이 될 만한 고속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는 대규모 토목건설을 할 수 있는 기술도 비용도 없었다. 서독 방문 후, 4년 동안 조용하고 치밀하게 고속도로 건설을 준비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을까? 당시 증언과 함께 경부고속도로와 관련된 박정희의 친필 메모와 설계도 등이 공개된다.
■ ‘경부고속도로의 작은 영웅들’
1968년 2월 1일, 야권과 언론 등에서 쏟아지는 많은 우려를 뒤로 한 채, 드디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첫 삽을 뜨게 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은 말 그대로 전투현장을 방불케 했다. 정해진 공기 내 완공될 수 있도록 현장은 밤낮없이 돌아가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당시 열악한 공사 환경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초석이 된 그들의 희생을 당시 건설 현장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들여다본다.
■ ‘경부고속도로의 숨겨진 이야기’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을 자극한 서독, 에르하르트 수상의 한마디, 당시 두 정상 사이에는 무슨 말이 오고 갔을까? 당시 정부는 경부고속도로에 필요한 토지를 어떻게 순식간에 사들였을까? 경부고속도로의 시작인 한남대교는 왜 4년에 거쳐 만들었을까? 현대건설 측에 수지에 맞지 않는 장사가 돼 버린 경부고속도로 건설,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고속도로 건설을 둘러싼 뒷이야기가 공개된다.
■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부산에서!’ - 경부고속도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다
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우리나라는 새로운 문화가 시작된다. 바로 일일생활권 문화이다.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부산에서 먹을 수 있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경제적인 효과뿐 아니라 레저문화라는 것이 처음 생겨났다. 또 여러 가지 볼 수 없었던 것들도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고속버스이다. 그 중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버스였던 그레이하운드! 그레이하운드의 운전기사와 버스 승무원은 모두의 선망 직종이었다. 미스코리아 출신 버스 승무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버스 기사와 승무원 등, 70년대 경부고속도로를 상징하던 사람들을 만난다.
■ ‘더 큰 세상을 향한 길,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이동 시간을 줄인 지리적 효과와 더불어 국토 어디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심리적 거리감을 줄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생각의 반경이 넓어졌고 자신의 가능성 및 꿈을 더 크게 꿀 수 있게 되었다.
※ 이 영상은 2013년 7월 13일 방영된 [다큐극장 - 428km의 땀과 눈물, 경부고속도로] 입니다.
#경부고속도로 #박정희 #정주영
- Category
- 다큐멘터리 - Documentary
- Tags
- KBS, 다큐멘터리, do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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