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격과 감격의 그날, 역사적인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다
지금부터 41년 전, 1972년 7월 4일. 자신이 평양에 다녀왔고, 북측과 평화통일 3대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합의했다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발언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잇따른 북한의 군사도발로 한국전쟁 이후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해있던 상황에서 남북의 고위당국자가 분단 4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만났고 평화통일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었다는 사실. 같은 시각, 평양에서도 동시에 발표된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을 충격과 감격에 젖어들게 했다. 남북대화의 물꼬를 틀며, 다시 조국통일의 그날을 꿈꾸게 만들었던 7.4남북공동성명의 역사적 의의를 되짚어본다.
■ 변화하는 세계정세, 적응해야 하는 남북 지도자의 고민 - 미국의 ’닉슨독트린‘에서 박정희의 ’8.15 선언‘까지
미국 닉슨대통령은 수세에 몰린 베트남전에서 명예롭게 발을 빼기위해”아시아의 문제는 아시아가 책임진다“는 내용의 이른바 [닉슨독트린]을 발표한다. 자신의 선거공약이었던 베트남 종전을 위해 키신저 미 국무장관을 비밀리에 북경에 보내고, 1972년 2월에는 닉슨 스스로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위한 중국방문을 감행한다. 냉전의 세계질서구도가 긴장완화의 데탕트 시대로 전환하던 그 무렵, 미국은 결국 주한미군 감축이라는 카드를 내놓는다. 예상치 못한 정세변화에 국가안보가 우려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대통령. 미국 또한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를 권하는 상황에 다다르자 박대통령은 1970년 8.15 경축사에서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 만남과 선의의 체제 경쟁]을 북측에 제의하면서 남북대화의 주도권을 잡게된다. 세계정세 변화에 당황했던 북한 김일성 역시 데탕트 물결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겠다는 판단 아래 남측인사 누구라도 만나겠다는 제의를 하면서 7.4남북공동성명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대화 없는 대결의 시대에서 대화 있는 대결의 시대로 이끌었던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오기까지, 남북이 서로 만나 대화의 장으로 가는 상황을 당시 세계정세 속에서 찾아본다.
■ 이후락의 비밀 평양행, 7.4남북공동성명 발표까지의 긴박한 왕래
이산가족 만남을 추진하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이 첨예한 입장차이로 몇 달째 제자리걸음을 걷자 박정희 대통령은 또다시 결단을 내린다. 바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기로 한 것. 이를 위해 남측의정홍진이 분단 최초로 비밀리에 휴전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고 북측의김덕현 또한 서울로 오면서 남북 고위급 회담의 사전준비작업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 5월 2일에 단행된 이후락의 평양행. 이후락은평양에서 김영주 조직부장과 만나고 3박 4일 마지막 날 밤에 극적으로김일성과 회담하면서 7.4남북공동성명의 골자를 논의하게 된다. 대한민국 정보부 수뇌의 평양방문.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평양밀행에 대비해 청산가리를 준비해간 이후락. 남측은 왜 이런 모험을 감행했던 것일까?
■ 지금도 유효한 7.4남북공동성명
7.4남북공동성명에서 밝힌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평화통일 3대 원칙. 이는 41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조국통일원칙이다. 비록 남북대화 시작 2년 1개월 만에 북측의 일방적인 대화거부 통보로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남북 고위당국자의 첫 만남과 평화통일 원칙 합의라는 역사적의의는 퇴색될 수 없을 것이다. 남북대화의 ‘원점’이고 ‘원형’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72년 7월 4일 남북이 만들어낸 극적인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이 갈라진지 4반세기만의 최초 만남이었고 동시에 평화통일을 향한 위대한 큰 걸음이었다.
※ 이 영상은 2013년 8월 10일 방영된 [다큐극장 - 평화통일을 향한 큰 걸음, 7.4남북공동성명] 입니다.
#박정희 #김일성 #통일
지금부터 41년 전, 1972년 7월 4일. 자신이 평양에 다녀왔고, 북측과 평화통일 3대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합의했다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발언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잇따른 북한의 군사도발로 한국전쟁 이후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해있던 상황에서 남북의 고위당국자가 분단 4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만났고 평화통일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었다는 사실. 같은 시각, 평양에서도 동시에 발표된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을 충격과 감격에 젖어들게 했다. 남북대화의 물꼬를 틀며, 다시 조국통일의 그날을 꿈꾸게 만들었던 7.4남북공동성명의 역사적 의의를 되짚어본다.
■ 변화하는 세계정세, 적응해야 하는 남북 지도자의 고민 - 미국의 ’닉슨독트린‘에서 박정희의 ’8.15 선언‘까지
미국 닉슨대통령은 수세에 몰린 베트남전에서 명예롭게 발을 빼기위해”아시아의 문제는 아시아가 책임진다“는 내용의 이른바 [닉슨독트린]을 발표한다. 자신의 선거공약이었던 베트남 종전을 위해 키신저 미 국무장관을 비밀리에 북경에 보내고, 1972년 2월에는 닉슨 스스로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위한 중국방문을 감행한다. 냉전의 세계질서구도가 긴장완화의 데탕트 시대로 전환하던 그 무렵, 미국은 결국 주한미군 감축이라는 카드를 내놓는다. 예상치 못한 정세변화에 국가안보가 우려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대통령. 미국 또한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를 권하는 상황에 다다르자 박대통령은 1970년 8.15 경축사에서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 만남과 선의의 체제 경쟁]을 북측에 제의하면서 남북대화의 주도권을 잡게된다. 세계정세 변화에 당황했던 북한 김일성 역시 데탕트 물결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겠다는 판단 아래 남측인사 누구라도 만나겠다는 제의를 하면서 7.4남북공동성명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대화 없는 대결의 시대에서 대화 있는 대결의 시대로 이끌었던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오기까지, 남북이 서로 만나 대화의 장으로 가는 상황을 당시 세계정세 속에서 찾아본다.
■ 이후락의 비밀 평양행, 7.4남북공동성명 발표까지의 긴박한 왕래
이산가족 만남을 추진하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이 첨예한 입장차이로 몇 달째 제자리걸음을 걷자 박정희 대통령은 또다시 결단을 내린다. 바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기로 한 것. 이를 위해 남측의정홍진이 분단 최초로 비밀리에 휴전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고 북측의김덕현 또한 서울로 오면서 남북 고위급 회담의 사전준비작업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 5월 2일에 단행된 이후락의 평양행. 이후락은평양에서 김영주 조직부장과 만나고 3박 4일 마지막 날 밤에 극적으로김일성과 회담하면서 7.4남북공동성명의 골자를 논의하게 된다. 대한민국 정보부 수뇌의 평양방문.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평양밀행에 대비해 청산가리를 준비해간 이후락. 남측은 왜 이런 모험을 감행했던 것일까?
■ 지금도 유효한 7.4남북공동성명
7.4남북공동성명에서 밝힌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평화통일 3대 원칙. 이는 41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조국통일원칙이다. 비록 남북대화 시작 2년 1개월 만에 북측의 일방적인 대화거부 통보로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남북 고위당국자의 첫 만남과 평화통일 원칙 합의라는 역사적의의는 퇴색될 수 없을 것이다. 남북대화의 ‘원점’이고 ‘원형’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72년 7월 4일 남북이 만들어낸 극적인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이 갈라진지 4반세기만의 최초 만남이었고 동시에 평화통일을 향한 위대한 큰 걸음이었다.
※ 이 영상은 2013년 8월 10일 방영된 [다큐극장 - 평화통일을 향한 큰 걸음, 7.4남북공동성명] 입니다.
#박정희 #김일성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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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 Docu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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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다큐멘터리, do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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