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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회_서울, 시간을 품다_천도교의 위대한 유산 "봉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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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우이동 도선사 입구에서 천도교종학대학원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대학원 뒤편의 단아한 한옥건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1912년, 천도교 3대 교조 의암 손병희 선생이 건립한 봉황각인데요.
당시 천도교 지도자를 양성하고 훈련시키기 위한,
천도교 수도원이었습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봉황각은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건축학적으로도 가치가 큰 건축물입니다.
민가풍의 외관에, 실내에는 궁궐의 부속건물 양식이 가미돼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주는데요.

건물 평면을 궁을자형으로 한 것은 천도교의
핵심사상 중 하나인 궁을사상을 반영한 것입니다.

천도교는 최제우가 일으킨 민족운동, 동학에
뿌리를 둔 종교인데요.

손병희 선생은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봉황각에서의 수련을 통해
483명의 천도교 지도자를 배출해냈습니다.

이들은 장차 3.1독립운동의 주축 세력으로
활약하게 되는데요.

말하자면 봉황각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인사들이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죠.

봉황각 경내에는 구 천도교중앙총부건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를 선포할 때 가장 먼저
내세운 일은 ‘천도교 교당 건축 사업’이었는데요.
중앙대교당 건축 성금 중 일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이곳은 근대교육 사업이 이뤄진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3.1독립운동 이후 천도교는 일제의 가혹한 핍박을 받았고,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들 대부분은 체포당했습니다.

그리고 손병희 선생은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천도교의 구심점이자,
3.1독립운동의 발원지가 되었던 봉황각.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의암 손병희.

100여년 전 봉황각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3.1운동의 뜨거운 함성을
듣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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