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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시 읽는 토요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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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2011년 1월 20일 용산 참사 2주기에 부쳐

지금 그곳엔 아무것도 없네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것도 없네
그곳은 텅 비었고
인적 없는 평지가 되었고
저녁 일곱 시 예배를 올릴 때에
건물 옥상에 야곱의 사다리를 희미하게 내려주던 달빛은
이제 구차하게 땅바닥에 엎드려
값비싼 자동차들의 광택을 돋보이게 할 뿐
오늘 그곳에 아무것도 없음이 우리를 경악하게 하네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되돌아볼 텐데
무너진 빌딩 한 층 한 층
깨진 유리창 한 장 한 장
부서진 타일 한 조각 한 조각
불길에 검게 그을리고 피와 살점이 묻은
학살의 증거들
학살 이후의 나날들
탄원들, 기도들, 투쟁들을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이야기할 텐데
야구와 낚시에 얽힌 소싯적 추억
늙은 가슴팍을 때리던 성경 구절
수많은 인내와 소박한 꿈들
그러다 우리가 어찌어찌 용산에 흘러오게 됐는지
그러나 더 이상 어찌어찌 끌려다니지 않겠다
이번만은 싸워보겠다 이겨보겠다
그날 불현 듯 하나의 영혼을 넘쳐
다른 영혼으로 흘러간 무모한 책임감에 대하여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서로에게 물어볼 텐데
학살자들은 또 무슨 궁리를 할까?
우리가 울부짖기도 전에 우리의 목을 죈 그들
우리가 죽기도 전에 우리의 관을 짠 그들
그런데 우리가 무죄를 입증하기도 전에
차가운 곁눈질을 던지며 그곳을 총총히 지나치던
시민이라는 이름의 방관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지만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있기만 하지는 않겠네
우리는 그 위에 일어서서 말하겠네
이제 인간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하나 불붙은 망루가 되었다
생존의 가파른 꼭대기에 매달려
쓰레기와 잿더미 사이에 흔들리며
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단 말이다!
절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고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서서 머리를 맞대고 따져볼 텐데
불운을 향해 녹슨 철사처럼 구부러지는 운명
불행을 향해 작은 자갈처럼 굴러가는 인생
모든 것의 원인과 뿌리에 골몰할 텐데
그러다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을 때에
무식한 우리는 외치겠지
어쨌든 이대로 이렇게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선량한 우리는 호소하겠지
원치 않는 증오심을 갖는다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최대한 많은 영혼을
그 위로 데리고 올 텐데
언제나 배고팠던 입
먹기에 급급했던 입
그 남루했던 입술들이 층층이 쌓여
높디높은 메아리의 첨탑을 일으켜 세우면
말 못 하고 외면했던 진실을
목구멍에서 소용돌이치며 솟구치는 진실을
우리는 말하기 시작하리
그리하여 거기 나지막한 돌 위에 선다면
오로지 희망, 희망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산 자와 죽은 자
기쁜 자와 슬픈 자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 다 똑같은 결심을 하게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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