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년 만의 해후, 독립운동가 최재형 묘가 복원되다
러시아 이주 1세대, 오늘날 가치로 수백억대 재산을 모은 거부였으나 전 재산을 한인들과 독립운동에 바치며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그의 사후 103년이 지난 오늘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돼 국립현충원에 안장됐으나 한러 수교 이후 밝혀진 ‘가짜 후손’ 논란으로 최재형의 묘는 멸실됐다. 이에 보훈부는 ‘시신이나 유해가 없으면 현충원에 안장할 수 없다’는 법을 바꿔 키르기스스탄 공동묘지에 안장된 최재형의 부인 최엘레나의 묘를 이장, 합장하는 방식으로 최재형 묘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 14일 현충원에서 합장식을 앞두고 있다.
최재형은 1869년 10세의 나이에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한 러시아 한인 1세대이다. 후에 양부모가 된 러시아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10대 시절 상선을 타고 두 번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가며 러시아어를 익히고, 상업에 눈을 뜬 뒤 농업과 군납업 등으로 거부의 반열에 오른 사업가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였다. 일제의 침탈과 가난을 피해 국경을 넘은 한인들을 위해 교회와 학교를 세웠고, 대동공보, 권업신문 등 한글 신문을 발행, 한인들의 지위 향상과 독립운동가들의 정보 교류의 창구를 제공했으며, 안중근, 홍범도 등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특히 한인들이 어려움에 부딪히면 발 벗고 나서 러시아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때 ‘시베리아의 페치카(난로)’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1907년 연해주에 온 안중근이 ‘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그는 한인들의 대부였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배후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다.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리고 침체된 항일운동을 다시 일으키는 전환점이 된 ‘하얼빈 의거’의 배후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자금과 정보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총과 사격 연습 장소를 마련해주었으며, 하얼빈 의거 전 안중근의 가족이 피신한 곳도 최재형의 집이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심문조서에 최재형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최재형의 행적은 한-러 수교 이후 러시아 문서보관소를 뒤지고, 후손들을 찾아 나섰던 사학자 박환(수원대 사학과) 교수에 의해 알려졌다.
▶한인들의 난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최재형의 독립운동은 본격화된다. 1908년 국외 최대규모 독립운동 단체인 동의회를 설립, 연추 의병을 조직해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한일병합 이후에도 최재형의 독립운동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동휘, 김립, 홍범도 등 백두산 일대 무장투쟁을 지원했고 1919년 연해주에서 발족한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대한국민회의’라는 임시정부(상해임시정부보다 한 달 빠르다)의 재정 지원 또한 최재형이 맡았다. 결국 최재형은 상해임시정부 초대 재경부 장관에 추대된다. 그러나 1920년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연해주 일대에 벌어진 ‘4월 참변’ 당시 체포돼 정식 재판 과정도 없이 총살당하고 만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재형의 정신을 기리는 사람들
러시아라는 지역적 한계와 후손들이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 일대로 강제 이주당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한 관계로 최재형의 행적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이름이 오늘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시민의 노력이 있었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는 동토의 땅에 한인들을 위해 교회와 학교를 세운 최재형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감동, 2019년 우수리스크 최재형 생가에 흉상과 기념비를 세우는데 후원하며 최재형 알리기에 앞장서 왔다. 수원대 사학과 박환 교수는 1992년부터 최근까지 러시아를 방문하여 최재형의 행적을 짐작할 수 있는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을 발견하였으며, 러시아와 만주 일대 독립운동사를 담은 50여 권의 책을 저술하는 등 우리 역사 속 잊힌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업적을 연구해 알리고 있다.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최재형기념사업회는 최재형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11년부터 최재형 장학회를 운영, 중앙아시아 고려인 후손들과 교류하며 장학금 전달과 더불어 역사 교육에 힘쓰고 있으며 매년 최재형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전주 최씨 종친회는 노비 출신으로 알려진 최재형이 사실은 전주 최씨의 후손이라는 점을 밝히고 최재형 선양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한다. 독립운동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최재형은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조국 독립의 길에 바친 숭고한 애국지사로, 동포의 어려운 삶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잘 살기 위해 노력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업가로, 혼돈의 시기 좌절하지 않고 국제적 안목을 키워 지역 사회와 국가에 공헌한 위대한 인간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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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ON [시베리아의 페치카 최재형] (2023년 8월 12일 방송)
#최재형 #독립운동가 #독립운동
러시아 이주 1세대, 오늘날 가치로 수백억대 재산을 모은 거부였으나 전 재산을 한인들과 독립운동에 바치며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그의 사후 103년이 지난 오늘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돼 국립현충원에 안장됐으나 한러 수교 이후 밝혀진 ‘가짜 후손’ 논란으로 최재형의 묘는 멸실됐다. 이에 보훈부는 ‘시신이나 유해가 없으면 현충원에 안장할 수 없다’는 법을 바꿔 키르기스스탄 공동묘지에 안장된 최재형의 부인 최엘레나의 묘를 이장, 합장하는 방식으로 최재형 묘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 14일 현충원에서 합장식을 앞두고 있다.
최재형은 1869년 10세의 나이에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한 러시아 한인 1세대이다. 후에 양부모가 된 러시아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10대 시절 상선을 타고 두 번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가며 러시아어를 익히고, 상업에 눈을 뜬 뒤 농업과 군납업 등으로 거부의 반열에 오른 사업가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였다. 일제의 침탈과 가난을 피해 국경을 넘은 한인들을 위해 교회와 학교를 세웠고, 대동공보, 권업신문 등 한글 신문을 발행, 한인들의 지위 향상과 독립운동가들의 정보 교류의 창구를 제공했으며, 안중근, 홍범도 등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특히 한인들이 어려움에 부딪히면 발 벗고 나서 러시아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때 ‘시베리아의 페치카(난로)’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1907년 연해주에 온 안중근이 ‘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그는 한인들의 대부였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배후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다.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리고 침체된 항일운동을 다시 일으키는 전환점이 된 ‘하얼빈 의거’의 배후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자금과 정보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총과 사격 연습 장소를 마련해주었으며, 하얼빈 의거 전 안중근의 가족이 피신한 곳도 최재형의 집이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심문조서에 최재형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최재형의 행적은 한-러 수교 이후 러시아 문서보관소를 뒤지고, 후손들을 찾아 나섰던 사학자 박환(수원대 사학과) 교수에 의해 알려졌다.
▶한인들의 난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최재형의 독립운동은 본격화된다. 1908년 국외 최대규모 독립운동 단체인 동의회를 설립, 연추 의병을 조직해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한일병합 이후에도 최재형의 독립운동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동휘, 김립, 홍범도 등 백두산 일대 무장투쟁을 지원했고 1919년 연해주에서 발족한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대한국민회의’라는 임시정부(상해임시정부보다 한 달 빠르다)의 재정 지원 또한 최재형이 맡았다. 결국 최재형은 상해임시정부 초대 재경부 장관에 추대된다. 그러나 1920년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연해주 일대에 벌어진 ‘4월 참변’ 당시 체포돼 정식 재판 과정도 없이 총살당하고 만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재형의 정신을 기리는 사람들
러시아라는 지역적 한계와 후손들이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 일대로 강제 이주당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한 관계로 최재형의 행적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이름이 오늘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시민의 노력이 있었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는 동토의 땅에 한인들을 위해 교회와 학교를 세운 최재형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감동, 2019년 우수리스크 최재형 생가에 흉상과 기념비를 세우는데 후원하며 최재형 알리기에 앞장서 왔다. 수원대 사학과 박환 교수는 1992년부터 최근까지 러시아를 방문하여 최재형의 행적을 짐작할 수 있는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을 발견하였으며, 러시아와 만주 일대 독립운동사를 담은 50여 권의 책을 저술하는 등 우리 역사 속 잊힌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업적을 연구해 알리고 있다.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최재형기념사업회는 최재형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11년부터 최재형 장학회를 운영, 중앙아시아 고려인 후손들과 교류하며 장학금 전달과 더불어 역사 교육에 힘쓰고 있으며 매년 최재형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전주 최씨 종친회는 노비 출신으로 알려진 최재형이 사실은 전주 최씨의 후손이라는 점을 밝히고 최재형 선양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한다. 독립운동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최재형은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조국 독립의 길에 바친 숭고한 애국지사로, 동포의 어려운 삶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잘 살기 위해 노력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업가로, 혼돈의 시기 좌절하지 않고 국제적 안목을 키워 지역 사회와 국가에 공헌한 위대한 인간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큐온’을 지켜주세요 https://me2.do/IMpBJf6Z
다큐ON [시베리아의 페치카 최재형] (2023년 8월 12일 방송)
#최재형 #독립운동가 #독립운동
- Category
- 다큐멘터리 - Documentary
- Tags
- KBS, 다큐멘터리, do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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