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전의 영웅, 기억과의 전쟁을 시작하다
월남파병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1972년의 안케전투. 그 격전 속에서 6일간 고립되어 대원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정태경 대령. 당시 중대장이었던 그는 이때의 전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전쟁영웅이 됐다. 여기까지라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영광 뒤에는 그만큼 큰 상흔이 남았다. 고립된 6일간 펼쳐진 지옥 같았던 전투와 그 안에서 죽어갔던 전우들의 모습은 41년 동안 그를 괴롭혀 왔다. 안케전투를 잠깐이라도 떠올리면 일주일간 잠을 이룰 수 없다는 정 대령. 가족들에게도 그 전투에 대해서만은 함구해왔다. 그렇게 기억을 차단한 채, 41년이 흘렀다. 그 사이 베트남에 갈 기회가 여럿 있었지만, 그는 한사코 거부해 왔다. 다시 악몽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3년 4월, 칠순을 앞둔 그는 베트남행을 결심했다. 외면해 왔던 전쟁의 기억과 맞서기로 한 것이다. 41년의 망설임 끝에 당시 전투현장을 찾은 정대령. 과연 그는 전쟁의 기억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제작진은 그의 특별한 여정을 함께하며 참전용사의 눈으로 본 월남파병의 역사와 그 의미를 담았다.
■ 한국 최초의 해외파병, 정부는 왜 파병을 선택했는가
1964년 9월,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의 파병을 시작으로 1973년 3월까지 8년 동안 이어진 월남 파병. 이는 한국 최초의 해외파병이자 연인원 32만이라는 장병을 보낸 대규모 파병이었다. 아직 한국이 국방을 온전히 책임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파병을 선택했던 것일까? 당시 정부는 참전의 명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에 대한 보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자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웠다. 또한, 주한 미군 철수에 대한 압박 역시 한 이유로 꼽았다. 그러나 파병을 먼저 제안한 것은 한국 정부라는데... 1961년 한국의 파병제안부터 1966년 브라운각서를 통해 미국의 경제 및 군사지원을 얻어내기까지의 과정에서 파병의 진짜 이유를 추적해 본다.
■ 전쟁이 준 기회, 월남특수
한국은 베트남 파병에서 약 10억 달러에 이르는 소위 월남특수를 얻었고 이는 경제성장의 디딤돌이 되었다. 미국의 원조와 파월병사들이 송금해온 월급,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초자금이 되었다. 또한, 국내 건설업, 해외운송업, 군수물자 산업은 베트남 진출을 통해 수출길을 열었고, 훗날 중동 붐으로 이어지는 기술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참전 경험을 통해 이뤄낸 한국군의 현대화 역시 큰 소득이었다.
■ 월남 붐과 한국사회
열대의 뜨거운 볕 아래서 장병들이 전투를 치르고 있던 때에 한국에서는 파월장병을 응원하기 위한 대대적인 사업들이 펼쳐졌다.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거행됐던 파월장병 환송식부터 위문편지 보내기, 당대 인기 연예인들을 동원한 위문공연까지 전 국민이 베트남으로 응원을 보냈다. 소위 월남 붐이 형성된 것이다. 대중문화 역시 베트남전에 관련된 노래며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당시를 살았던 시민들과 베트남전 내내 가장 많은 위문공연을 다녀온 가수김세레나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살펴본다.
■ 잊혀진 전쟁, 그러나 끝나지 않은 전쟁
2013년, 베트남 철수 이후 40년이 흘렀다. 참전용사들은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고, 한국사회에서 베트남 파병은 경제성장의 주춧돌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잊혀가고 있다. 그러나 잊어버리기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와 고엽제 후유(의)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각 개인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이 영상은 2013년 5월 25일 방영된 [다큐극장 - 최초 해외파병 베트남전] 입니다.
#베트남전 #군대 #전쟁
월남파병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1972년의 안케전투. 그 격전 속에서 6일간 고립되어 대원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정태경 대령. 당시 중대장이었던 그는 이때의 전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전쟁영웅이 됐다. 여기까지라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영광 뒤에는 그만큼 큰 상흔이 남았다. 고립된 6일간 펼쳐진 지옥 같았던 전투와 그 안에서 죽어갔던 전우들의 모습은 41년 동안 그를 괴롭혀 왔다. 안케전투를 잠깐이라도 떠올리면 일주일간 잠을 이룰 수 없다는 정 대령. 가족들에게도 그 전투에 대해서만은 함구해왔다. 그렇게 기억을 차단한 채, 41년이 흘렀다. 그 사이 베트남에 갈 기회가 여럿 있었지만, 그는 한사코 거부해 왔다. 다시 악몽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3년 4월, 칠순을 앞둔 그는 베트남행을 결심했다. 외면해 왔던 전쟁의 기억과 맞서기로 한 것이다. 41년의 망설임 끝에 당시 전투현장을 찾은 정대령. 과연 그는 전쟁의 기억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제작진은 그의 특별한 여정을 함께하며 참전용사의 눈으로 본 월남파병의 역사와 그 의미를 담았다.
■ 한국 최초의 해외파병, 정부는 왜 파병을 선택했는가
1964년 9월,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의 파병을 시작으로 1973년 3월까지 8년 동안 이어진 월남 파병. 이는 한국 최초의 해외파병이자 연인원 32만이라는 장병을 보낸 대규모 파병이었다. 아직 한국이 국방을 온전히 책임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파병을 선택했던 것일까? 당시 정부는 참전의 명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에 대한 보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자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웠다. 또한, 주한 미군 철수에 대한 압박 역시 한 이유로 꼽았다. 그러나 파병을 먼저 제안한 것은 한국 정부라는데... 1961년 한국의 파병제안부터 1966년 브라운각서를 통해 미국의 경제 및 군사지원을 얻어내기까지의 과정에서 파병의 진짜 이유를 추적해 본다.
■ 전쟁이 준 기회, 월남특수
한국은 베트남 파병에서 약 10억 달러에 이르는 소위 월남특수를 얻었고 이는 경제성장의 디딤돌이 되었다. 미국의 원조와 파월병사들이 송금해온 월급,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초자금이 되었다. 또한, 국내 건설업, 해외운송업, 군수물자 산업은 베트남 진출을 통해 수출길을 열었고, 훗날 중동 붐으로 이어지는 기술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참전 경험을 통해 이뤄낸 한국군의 현대화 역시 큰 소득이었다.
■ 월남 붐과 한국사회
열대의 뜨거운 볕 아래서 장병들이 전투를 치르고 있던 때에 한국에서는 파월장병을 응원하기 위한 대대적인 사업들이 펼쳐졌다.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거행됐던 파월장병 환송식부터 위문편지 보내기, 당대 인기 연예인들을 동원한 위문공연까지 전 국민이 베트남으로 응원을 보냈다. 소위 월남 붐이 형성된 것이다. 대중문화 역시 베트남전에 관련된 노래며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당시를 살았던 시민들과 베트남전 내내 가장 많은 위문공연을 다녀온 가수김세레나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살펴본다.
■ 잊혀진 전쟁, 그러나 끝나지 않은 전쟁
2013년, 베트남 철수 이후 40년이 흘렀다. 참전용사들은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고, 한국사회에서 베트남 파병은 경제성장의 주춧돌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잊혀가고 있다. 그러나 잊어버리기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와 고엽제 후유(의)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각 개인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이 영상은 2013년 5월 25일 방영된 [다큐극장 - 최초 해외파병 베트남전] 입니다.
#베트남전 #군대 #전쟁
- Category
- 다큐멘터리 - Documentary
- Tags
- KBS, 다큐멘터리, do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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