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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전쟁 6 25 백마고지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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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자유진영의 유엔군 참전 그리고 물자지원, 뒤따라 공산진영의 중공군의 참전과 소련의 물자지원으로 6·25전쟁은 곧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전쟁이었고, 세계 대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1951년 6월 13일 양측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전쟁 이전의 상황에서 휴전으로 평화를 회복한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제한된 목표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적에 대한 압박을 유지한다!'
그렇게 시작된 가장 치열했던 피비린내나는 비극의 시작, 바로 고지쟁탈전이다.
피의 능선 전투 (51.8.18 ~ 9.5), 동부전선, 강원도 양구군 983고지
19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으로 38선 부근을 확보하지만, 전선은 진격과 후퇴가 없는 교착상태가 되던 중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방어에 유리한 고지 확보를 위해 美 2사단과 국군 5사단 36연대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양구군 983고지 일대를 탈환하라!"
그러나 이 일대는 이미 북한군 12사단 1연대와 27사단 14연대가 점령하고, 아군의 강력한 포격에 견딜 수 있도록 유개호와 교통호를 가설하여 난공불락의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1951년 8월 18일 유엔군과 국군의 박격포를 포함한 200문의 포가 일제히 집중사격을 실시하며, '피의 능선' 탈환을 시작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공격에도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국군은 정면 공격만으로는 고지 탈환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정면에 2개 중대, 후사면에 1개 중대를 침투시킨다. 드디어 공격 5일만인 8월 22일, '피의 능선'을 탈환한다.
18일 간 계속된 '피의 능선' 전투는 피아구분없이 2만 여명이 죽거나 다치는 대혈전이었고, 이 전투에서 하루 평균 3만 발의 포탄이 사용되었다. 수 많은 사상자를 낸 이 전투를 '능선이 피에 물들었다'고 해서 '피의 능선 전투'라 부르게 됐다.
백마고지 전투 (52.10.6~15), 중부전선 강원도 철원 395고지
한편 중부전선에서는 1951년 9월, 국군 9사단은 11Km에 이르는 넓은 철원평야 일대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적 요충지 395m의 백마고지를 방ㅇ어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3개 사단을 보내 백마고지를 점령하려 한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포격을 실시하며 공격을 시작했다. 하루에 2번, 많게는 5번 이상 주인이 바뀌는 백마고지.
1952년 10월 12일
국군 30연대 1대대는 고지 재탈환을 위해 역습을 강행한다.
중공군은 이 백마고지 전투 후 새로운 고지쟁탈전을 단념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지 주인이 바뀌며 10여 일간 계속된 공방전으로 백마고지에 집중된 포탄 수 27만 여발, 항공지원 총 754회!
숱한 포격으로 인해 벌거숭이가 된 모양새가 백마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백마고지'이다.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고지쟁탈전의 무대이다.
Category
다큐멘터리 - Docu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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