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최후의 보루 낙동강 방어선, 치열했던 전투 (김인하)
강경일)
6?25전쟁 발발 67주년을 맞아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방어선전투를
재조명하는 시간, 오늘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혜인)
지난 시간까지 낙동강방어선 구축과정과 그 중요성에 대해 소개해드렸는데요.
이번 시간엔 6?25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방어선전투의 과정을 되짚어봅니다.
김인하 대윕니다.
최후의 보루이자 구국의 저지선, 낙동강방어선
1950년 8월과 9월, 전선 전역에선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투가 펼쳐집니다.
[INT] 최용성 /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중요하지 않은 전투는 없습니다. 굳이 가장 중요한 전투를 선정한다면
8월 공세를 대표적으로 막은 다부동 전투를 들 수 있고, 9월 공세를 막은 영천 전투를 들 수 있습니다.
북한군은 견고한 방어선을 뚫기 위해 국군 1사단의 책임지역이었던 다부동에 3개 사단 병력을
집중합니다.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섭니다.
[INT] 최용성 /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
만약에 다부동 방어선이 무너졌다면 대구는 적에게 점령당했을 겁니다.
대구가 대용목표이기 때문에 다음 목표 선택권이 있습니다. 북한군이 좌측 경주 쪽으로 가도 되고,
우측으로 가서 마산 쪽으로 해서 부산을 공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구를 잃으면) 아군은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양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대용목표 : 공격 측이 선택의 자유를 갖는 주요 목표 지점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다부동 전투의 처절함을 보여줍니다.
국군은 혈전 끝에 다부동을 사수하고, 북한군은 또 한번 최후의 총력전을 준비합니다.
[INT] 최용성 /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
실패한 북한군은 다시 병력을 빼서 영천지역으로 돌립니다.
대대적으로 공략하는데, 그것이 9월 2일입니다. (영천 역시 수복되면) 대구로 갈지, 경주로 갈지
아군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도 방어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병력을 추가 투입합니다.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할 정도로 극박한 상황.
막대한 화력지원과 전투의지를 갖춘 국군은 영천 역시 사수합니다.
김일성은 훗날 전쟁의 패인을 분석하면서, 영천을 점령하지 못해 패배했다고 언급할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INT] 최용성 /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
도망간 북한군의 근거리를 찾아서, 후방에 있는 전투기를 요청하고 (적을) 궤멸시키죠.
그 날짜가 9월 13일입니다. 그리고 2일 후에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된 겁니다.
결국,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전투에선 승리했지만, 그 상흔은 올곧이 우리 국민과 영토가 받아내야만 했습니다.
[INT] 최용성 /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같은 동족끼리 철저하게, 치열하게, 참혹하게 싸운 전투입니다.
군인만 싸운게 아니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적과 싸워서 이겨야한다는
일념 하에 동원된 총력전이었습니다.
학도병, 민간인 지게부대, 여성 간호사 등 온 국민이 발벗고 나섰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목숨과 낙동강을 맞바꾼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방뉴스 김인합니다.
강경일)
6?25전쟁 발발 67주년을 맞아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방어선전투를
재조명하는 시간, 오늘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혜인)
지난 시간까지 낙동강방어선 구축과정과 그 중요성에 대해 소개해드렸는데요.
이번 시간엔 6?25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방어선전투의 과정을 되짚어봅니다.
김인하 대윕니다.
최후의 보루이자 구국의 저지선, 낙동강방어선
1950년 8월과 9월, 전선 전역에선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투가 펼쳐집니다.
[INT] 최용성 /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중요하지 않은 전투는 없습니다. 굳이 가장 중요한 전투를 선정한다면
8월 공세를 대표적으로 막은 다부동 전투를 들 수 있고, 9월 공세를 막은 영천 전투를 들 수 있습니다.
북한군은 견고한 방어선을 뚫기 위해 국군 1사단의 책임지역이었던 다부동에 3개 사단 병력을
집중합니다.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섭니다.
[INT] 최용성 /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
만약에 다부동 방어선이 무너졌다면 대구는 적에게 점령당했을 겁니다.
대구가 대용목표이기 때문에 다음 목표 선택권이 있습니다. 북한군이 좌측 경주 쪽으로 가도 되고,
우측으로 가서 마산 쪽으로 해서 부산을 공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구를 잃으면) 아군은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양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대용목표 : 공격 측이 선택의 자유를 갖는 주요 목표 지점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다부동 전투의 처절함을 보여줍니다.
국군은 혈전 끝에 다부동을 사수하고, 북한군은 또 한번 최후의 총력전을 준비합니다.
[INT] 최용성 /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
실패한 북한군은 다시 병력을 빼서 영천지역으로 돌립니다.
대대적으로 공략하는데, 그것이 9월 2일입니다. (영천 역시 수복되면) 대구로 갈지, 경주로 갈지
아군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도 방어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병력을 추가 투입합니다.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할 정도로 극박한 상황.
막대한 화력지원과 전투의지를 갖춘 국군은 영천 역시 사수합니다.
김일성은 훗날 전쟁의 패인을 분석하면서, 영천을 점령하지 못해 패배했다고 언급할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INT] 최용성 /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
도망간 북한군의 근거리를 찾아서, 후방에 있는 전투기를 요청하고 (적을) 궤멸시키죠.
그 날짜가 9월 13일입니다. 그리고 2일 후에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된 겁니다.
결국,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전투에선 승리했지만, 그 상흔은 올곧이 우리 국민과 영토가 받아내야만 했습니다.
[INT] 최용성 /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같은 동족끼리 철저하게, 치열하게, 참혹하게 싸운 전투입니다.
군인만 싸운게 아니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적과 싸워서 이겨야한다는
일념 하에 동원된 총력전이었습니다.
학도병, 민간인 지게부대, 여성 간호사 등 온 국민이 발벗고 나섰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목숨과 낙동강을 맞바꾼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방뉴스 김인합니다.
- Category
- 다큐멘터리 - Docu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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