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를 열망하다 "옛 영등포 교도소"
1949년 부천 형무소로 개청하였던 영등포 교도소는 이제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될 전망이다. 조만간 영등포교도소를 철거하고 대규모 주상 복합단지로 개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6만 7696㎡의 부지에 14개 동의 교도소에 800여 명 수용, 42개 동의 구치소에 1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영등포 교도소를 거쳐간 사람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물들도 많았다.
1974년 유신헌법에 반대하며,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첫 번째 위반자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던 백기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재판에서 6년 4개월의 선고를 받은 김지하, 1986년 민청련 사건으로 실형 선고를 받은 김근태 등 1970~80년대 민주화를 외치던 재야운동가와 지식인들 뿐 아니라 그들을 고문했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인질극을 벌였던 탈주범 지강헌 등 거쳐간 수감자들만 봐도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곳이 영등포 교도소였다.그 중에서도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을 만천하에 알린 곳도 바로 영등포 교도소였다.1986년 5.3 인천사태 주도 혐의로 영등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이부영(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이 남영동 대공수사단에서 박종철군을 고문해서 죽인 사건의 전말을 영등포 교도소 교도관을 통해 외부에 알리면서 6월 항쟁으로 이어져 87년 민주화운동의 촉발제가 되었다.어른 한 명이 돌아눕기도 힘들 만큼 비좁은 독방과 수감자들의 흔적, 그리고 그 흔적과 함께 영등포 교도소는 이제 철거를 앞두고 있다.한때, 민주화의 상징으로 불리며 현대사의 영욕을 지켜본 영등포 교도소는 지난 4월 시민들에게 단 하루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지만 우리의 역사는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지난날을 기억할 것이다.
1949년 부천 형무소로 개청하였던 영등포 교도소는 이제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될 전망이다. 조만간 영등포교도소를 철거하고 대규모 주상 복합단지로 개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6만 7696㎡의 부지에 14개 동의 교도소에 800여 명 수용, 42개 동의 구치소에 1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영등포 교도소를 거쳐간 사람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물들도 많았다.
1974년 유신헌법에 반대하며,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첫 번째 위반자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던 백기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재판에서 6년 4개월의 선고를 받은 김지하, 1986년 민청련 사건으로 실형 선고를 받은 김근태 등 1970~80년대 민주화를 외치던 재야운동가와 지식인들 뿐 아니라 그들을 고문했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인질극을 벌였던 탈주범 지강헌 등 거쳐간 수감자들만 봐도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곳이 영등포 교도소였다.그 중에서도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을 만천하에 알린 곳도 바로 영등포 교도소였다.1986년 5.3 인천사태 주도 혐의로 영등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이부영(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이 남영동 대공수사단에서 박종철군을 고문해서 죽인 사건의 전말을 영등포 교도소 교도관을 통해 외부에 알리면서 6월 항쟁으로 이어져 87년 민주화운동의 촉발제가 되었다.어른 한 명이 돌아눕기도 힘들 만큼 비좁은 독방과 수감자들의 흔적, 그리고 그 흔적과 함께 영등포 교도소는 이제 철거를 앞두고 있다.한때, 민주화의 상징으로 불리며 현대사의 영욕을 지켜본 영등포 교도소는 지난 4월 시민들에게 단 하루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지만 우리의 역사는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지난날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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